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레이 사하로프 (문단 편집) == 정치인 == 그럼에도 사하로프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81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단식투쟁을 벌였다. 많은 국가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는 그에게 오는 편지도 차단해 버리면서 그를 아예 사회에서 배제시켰다. 이렇게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던 도중, 1986년 12월 16일 모스크바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바로 고르바초프가 그에게 사면을 내린 것이었다. 당시 서방과 유화정책을 결심한 [[고르바초프]]는 그를 사면시키면서 개혁의지를 보여주고자 했고, [[글라스노스트]]의 일환으로써 그를 사면시켰다. 유형에서 석방된 이후 1989년에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첫 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회의에서 당시 소련에서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이 자행한 [[전쟁범죄]]를 비난했다. 그러자... [youtube(26pJ4rU5cfE)] '''수많은 의원들은 그에게 온갖 야유와 비난을 퍼부으며 그의 연설을 중단시켰다.''' 당시 이 영상은 텔레비전으로 '''소련 전역에 생중계'''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보다 못한 인민대표 중 한 사람이자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총장이었던 유리 아파나시예프(Юрий Афанасьев)가 회의장에서 '공격적인 청취대중'이라는 단어로 인민대표들이 체제와 반대되는 의견을 야만적으로 침묵시키려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난했다. 이후 그는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인권, 느슨한 연방제에 관한 내용을 담은 헌법을 기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유형생활과 정치활동에서 얻은 스트레스가 악화되었는지, 결국 정치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89년 12월 14일 별세해 보스트랴코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ople_gathered_at_the_grave_of_Andrei_Sakharov%2C_1990.jpg]] 사하로프의 장례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